침묵하는 시간, 대화하는 시간
48p
"민준 씨는 삶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네?"
"전 없다고 생각해요."
"...."
"없으니까 각자 찾아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이 찾은 의미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고요."
"......네."
"그런데 못 찾겠어요."
".....뭘요?"
"의미요. 어디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까요. 내 삶의 의미는 사랑에 있을까? 아니면 우정일까? 책일까? 서점일까? 어렵네요."
"......"
"찾고 싶다고 해서 금방 찾아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겠죠?"
일요일을 뿌듯하게 보낸 밤에는
159p
그녀는 일요일 밤에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일요일을 뿌듯하게 보낸 밤에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더 이런 날이 있었으면 했지만, 그래도 월요일 아침이 오면 하루를 급히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다가 출근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딱 이 정도, 아니 여기에서 조금만 더 여유롭게 살 수 있다면, 하고 영주는 생각했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자유로울 수 있다면, 영주는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점이 자리를 잡는다는 건
195p
"나는 그래서 책을 읽는 것 같아. 책이란 말만 나오면 따분하지?"
영주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민철이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책을 읽다보면 알게 되는 게 있어. 저자들ㅇ이 하나같이 다 우물에 빠져봤던 사람이라는 걸. 방금 빠져나온 사람도 있고, 예전에 빠져나온 사람도 있고.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앞으로 또 우물에 빠지게 될 거라고."
"우물에 빠졌었고, 또 앞으로 빠질 사람들의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는 거예요?"
민철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음...... 간단해. 우리는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힘을 낼 수 있거든. 나는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저 사람들도 다 힘드네? 내 고통은 지금 여기 그대로 있지만 어쩐지 그 고통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지는 것도 같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른 우물에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없을 것 같다는 확신도 들어."
영주가 옅은 미소를 머금고 계속 말했다. 그 앞에서 민철은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영주의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무력한 상태로는 그만 있어볼까 하는 마음이 드는거야. 그래서 웅크린 몸을 쭉 일으켜 세웠는데, 글쎄! 우물이 그리 깊지 않았던 거야. 이것도 모르고 우물 속에서 그렇게 음침하게 살고 있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오른쪽 35도 각도쯤에서 살랑살랑 미풍이 불어오는 거야. 문득, 살아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바람에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중간 생략)
"가끔 그런 생각이 들거든. 아, 이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바람을 좋아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저녁 바람만 맞으면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어 얼마나 다행인가. 지옥엔 바람이 없다는데 그럼 여기가 지옥은 아닌 듯하니 또 얼마나 다행인가. 하루 중 이 시간만 확보하면 그런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우리 인간은 복잡하게 만들어졌지만 어느 면에선 꽤 단순해. 이런 시간만 있으면 돼. 숨통 트이는 시간. 하루에 10분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아, 살아 있어서 이런 기분을 맛보는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시간."
당신을 응원합니다
232p
"야근 자주 했어요?"
"자주 했어요. 무지 자주."
"야근을 무지 자주 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싶죠."
"맞아요...... 그런데 그날 퇴근을 하는데 갑자기 맥주가 너무 마시고 싶은 거예요."
"맥주......"
"그런데 그냥 맥주가 아니라 서서 마시는 맥줏집 맥주를 마시고 싶더라고요."
"서서요?"
"네, 앉으면 피곤이 좀 가시잖아요. 그게 싫어서. 엄청 피곤한 상태로 맥주를 마시고 싶더라고요. 그럼, 어떤 맛일까......"
승우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영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맛이었는데요?"
"꿀맛."
"기어이 서서 마시는 맥줏집을 찾아간 거네요?"
"그럼요. 사람이 많았어요. 겨우 자리 하나 났더라고요. 거기 서서 맥주 한잔을 하는데 정말 행복했어요."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진 않네요."
"제가 하려던 말이 그거예요."
"행복?"
"네,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진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행복은 먼 과거에나, 먼 미래에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거였어요. 그날의 그 맥주처럼, 오늘의 이 모과차처럼요."
당신을 응원합니다
236p
"누군가가 들으면 부러워할 문장이네요."
"뭐가요?"
"노력하는 건 자신 있었어요, 라는 문장요."
"왜요?"
"노력할 수 있는 것이 재능이라는 말 많이들 하잖아요."
"아......"
"그런데 왜 생각이 바뀌었나요? 왜 아리라는 분이 말한 행복이 싫어졌어요?"
"행복하지 않아서요."
영주가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일생 동안 공들여 만든 성취, 좋아요. 그런데 아리라는 분의 말이 나중에는 이렇게 이해되더라고요. 그가 말하는 행복이란 마지막 순간을 위해서 긴 인생을 저당 잡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요. 마지막 순간에 한 번 행복해지기 위해 평생 노력만 하면서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행복이란 게 참 끔찍해졌어요. 나의 온 생을 단 하나의 성취를 위해 갈아 넣는 것이 너무 허무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이제 행복이 아닌 행복감을 추구하며 살아야지 하고 생각을 바꾼 거예요."
제가 첨삭해드릴게요
264p
"그때 손님이라고 대답하셨잖아요. 혹 손님 말고 지금 이 순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또 있는지 궁금합니다."
영주가 생각이 나지 않아 없다고 대답하니 승우가 말했다.
"그날, 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죠. 사실 그때도 어렴풋이 내가 뭘 기다리고 있는지 알 것 같긴 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너무 성급하게 내 마음을 알아채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빨리 알아채기보단, 천천히 알아가길 원했거든요."
영주는 지금 승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승우를 보고 있었고, 그런 영주를 보며 승우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 순간 제가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것."
두 사람은 3미터 정도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입니다."
과거 흘려보내기
301p
영주는 지금 마음껏 창인을 생각하고 있다.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 꾹꾹 눌러두었던 생각과 감정을 꺼내놓고 있다. 과거의 이미지와 기억들이 가슴을 쿡쿡 찔러 오지만 이제는 버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껏 눌러두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기에 여전히 그녀 안에 그 모든 것이 고여 있는지도 몰랐다. 앞으로는 흘려보내야 할 것이다. 다시 얼마간 울어야 한대도 그래야 할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흘려보내고 또 흘려보내다 이젠 과거를 떠올려도 눈물이 나지 않게 될 무렵이 되면, 영주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의 현재를 기쁘게 움켜쥘 것이다. 더없이 소중하게 움켜쥘 것이다.
좋은 사람이 주변에 많은 삶
325p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들 도움이 컸어."
"누구?"
민준이 벽에 등을 기대며 성철을 봤다.
"주변 사람들.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도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해줬거든. 내가 말하지 않는데도 눈치챘다는 듯 괜히 호들갑 떨며 위로나 걱정의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었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냥 받아드리는 느낌이었어. 그러니까 내가 애써 나를 부연 설명하거나 지금의 나를 거부하지 않게 됐던 것 같아. 나이가 드니까 이런 생각도 들더라."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공간
343p
서점에서 일을 하는 동안 전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책에서 배운 것들을 상상 속에서만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거든요. 저는 많이 부족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지만 이곳에섯 일을 하며 조금씩 더 나누고 베풀고자 했어요. 네, 전 나누고 베풀자고 굳게 다짐해야만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에요. 원래 태어난 바가 품이 크고 너그럽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요. 이곳에서 생활하며 저는 '앞으로도' 계속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거예요. 책에서 읽은 좋은 이야기들이 책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고 싶어요. 내 삶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도 남에게 들려줄 만한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무엇이 서점을 살아남게 하는가?
358p
우리 네 사람이 책으로 의사소통하고 책으로 농담하고 책으로 우정을 다지고 책으로 사랑을 이어간다면 손님들도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책을 읽는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의 결이 휴남동 서점에서 느껴진다면, 책을 읽는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휴남동 서점에서 흘러 나간다면, 사람들도 한 번쯤 책을 펼치려 하지 않을까. 살아가다가 문득 이야기가 필요해지는 시점이 올 때 사람들이 책을 찾을 수 있게끔, 영주는 계속 책을 읽고 책을 소개하며 살고 싶었다.
영주의 오늘 하루는 어제와 비슷할 것이다. 책에 둘러싸인 채 주로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고, 책에 관한 일을 할 것이며, 책에 관한 글을 쓸 것이다. 그러는 틈틈이 먹고, 생각하고, 수다도 떨고, 우울했다가 기뻐할 것이며, 책방을 닫을 즈음에는 오늘 하루도 이 정도면 괜찮았다며 대체로 기쁜 마음으로 서점 문을 나설 것이다. (중간 생략) 하지만 결국은 어젯밤에 읽다 만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독일 것이고, 그러다가 책을 덮고는 침대에 누울 것이다. 영주는 하루를 잘 보내는 건 인생을 잘 보내는 것이라고 어딘가에서 읽은 문구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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